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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단계 야마 (Yama, 禁氣 전 인류에 고통되는 보편적 도덕률)

제1단계는 야마 (윤리적인 계율들), 즉 신조, 국가, 연령과 시대를 초월한 계율들로, ① 아 힘 사(ahimsa, 비폭력, 불상 생) ②시트야(satay, 진실, 불망의) ③ 아 그에야 (asteya, 不偸盜) ④ 브라 마차리야 (brahmacharya, 절제, 금욕) ⑤ 아파 리그라 하 (aparigraha, 不貪)이다.

  이 계율들은 사회와 개인에 대한 도덕규범으로서 만약 지키지 않는다면 혼란, 폭력, 거짓, 도벽, 방탕, 탐욕 등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악의 근원은 바로 탐욕과 집착 등의 감정들인데 단지 그 정도가 적을 수도, 중간일 수도, 과다할 수도 있다. 그것들은 단지 고통과 무지를 가져다줄 뿐이다. 파탄잘리는 야마의 다섯 가지 계율로서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이 악의 근원들을 파헤치고 있다.

 

 

  ① 아 힘 사 (Ahimsa, 비폭력, 불살생) : 부정관사인 부정을 의미하는 'a' 살생이나 폭력을 의미하는 명사인 'hims'의 합성어이다. 그러나 단순히 살생하지 말라는 부정의 명령보다는 사랑이라는 긍정적이고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사랑은 우리가 같은 어버이 Lord를 가진 자식들이기 때문에 모든 생물체를 포용하고 있다.
  요기는 사물을 파괴하거나 생명체를 죽이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한다. 인간들은 보통 먹이를 구하거나 또는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살생한다. 그러나 단지 그가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그가 체질상 비폭력주의자나 요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요가의 수행에 있어서 채식 식이요법이 필수적인 것은 사실이다. 잔인한 폭군이 채식주의자일 수 있으며, 하여튼 폭력은 먹거리의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도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칼은 과일을 깎기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고 적을 찌르기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은 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자에게 있다.
  사람은 그 자신의 이익 즉 자기 육체, 그가 사랑하는 것들, 그들의 재산이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다. 그가 혼자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사람은 모든 힘의 원천인 절대 신성을 의지함으로써 어떠한 악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폭력은 두려움, 나약함, 무지와 불안해서 나온다. 이것을 제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인생관을 바로잡고 마음을 재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폭력은 인간이 그들의 믿음을 무지와 미신보다 오히려 현실과 탐구에 바탕을 두고 있을 때 반드시 쇠퇴하게 마련이다.
  요기는 모든 생명체에는 고유한 삶의 몫이 있고 그 자신만큼 똑같이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는 타인을 독기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를 애정이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요기는 자기 삶이 타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행복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긴다. 그는 자기 행복보다 다른 이들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고, 그가 만나는 모두에게 기쁨의 원천이 된다. 마치 부모는 어린아이가 첫걸음마를 뗄 때 요기를 주듯이, 요기는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그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정의를 요구한다. 반면에 우리들 자기 잘못에는 자비와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요기는 그 자신에 의한 잘못에 대해서는 정의를 구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요기는 그 자신에 의한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한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고 그것을 가르친다. 항상 자신이 완벽에 이르도록 정진하면서 가없는 사랑과 연민으로 그들의 삶을 향상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준다.
  요기는 죄인이 범한 죄는 미워하되 그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 그는 죄인이 범한 행위에 대해서 처벌하기보다는 참회하도록 한다. 죄는 미워하되 죄를 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마치 주정뱅이의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되 그 주벽은 미워하는 것과 같다. 악행에 대한 사랑이 없는 미움은 폭력을 부른다. 또, 악행을 책하는 마음 없이 그저 사랑만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결국 불행에 이르게 된다. 요기는 죄인 속에 들어 있는 악과는 싸우면서 그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 올바른 길임을 알고 있다. 그가 사랑으로 맞선 싸움은 반드시 이긴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자식의 나쁜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서 매를 들듯이, 진실한 아 힘 사의 실행자는 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적을 사랑한다.
  아힘사를 따르다 보면 어느새 아바야 (abaya, 두려움으로부터의 벗어남)과 아크로 이른다. 두려움 없는 삶은 단지 순수한 삶을 영위하는 자들에게 온다. 요기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아무것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자신을 살피는 수행이 그를 맑게 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사람을 덮쳐 마비시킨다.
  사람들은 미래, 미지의 것,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생계 수단, 부와 명예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을 죽음에 대한 공포다. 요기는 그 자신과 영혼이 잠시 머무르는 집과 같은 육체가 별개의 것임을 안다. 그는 자신 속에서 만물을 보고 또 만물 속에서 자신을 보기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병들고, 늙고, 쇠약해지고,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는 유리들 육식이지만 영혼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요기에 죽음은 삶에의 열정을 불어넣는 자극제와도 같다. 그는 '절대 신성'에 그의 마음, 이성, 그의 전 인생을 바쳐 오고 있다. 그의 모든 것이 '절대 신성'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분노 Krdkha 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마음을 타락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성숙에 연결되는 분노이다. 전자의 바탕에는 자만심이 깔려 있어 사소한 것에도 우리를 성나게 한다. 이것은 마음이 올바른 견해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이와는 반대로, 요기는 그의 내면이 비루해지고, 그의 경험과 학식이 그를 어리석음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할 때 자신에게 화를 낸다. 그는 그 자기 잘못을 다룰 때는 매우 엄격하지만 매우 곤 용적이고 유하다. 마음의 온화함은 요기의 특별한 성품이고, 그의 마음은 모든 고통을 녹인다. 요기의 마음속에는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타인에 대한 관용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서 요기가 있는 곳에서는 모든 적의가 사라지고 만다.

 

② 시트야 (Satya, 진실, 불망의): 우리 행동이나 도덕규범의 최고봉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실은 신 God이고 신은 곧 진실이다.'라고 했다. 불이 불순물을 태우고 금을 정제하는 것처럼, 진실의 불꽃은 요기를 정화하고 그 안에 있는 불순물을 없애 준다. 만약 마음이 진실을 생각하고, 혀는 진실을 말하고 삶 전체가 진실 위에 있다면, 인간은 신과 드리던 결합할 수 있게 된다.
'실체' 그 본질은 사랑과 진실로서, 이 두 가지 면을 통해서 실체를 나타낸다. 요기의 삶은 이 실체의 두 가지 면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아 힘 사(비폭력)가 요구되는 것이다. 사느냐는 생각(思), 말(言), 행동에 있어서 완전한 진실성을 전세로 한다. 어떤 형태 로든지의 거짓은 구도자를 진실의 근본 법칙에서 벗어나게 한다.
  진실은 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말에는 네 가지 죄악이 있다. 악성과 망에, 기어, 양설이나 다른 사람이 중하게 여기는 것을 무시하는 것들이다. 소문을 꾸며내는 사람은 뱀보다 더 사악하다. 말을 삼가서 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악의를 뿌리째 뽑아 버리게 한다. 누구에게도 적의를 품고 있지 않을 때, 마음은 모든 이들에 대한 자비로 가득 찬다. 자신의 혀를 조절하는 법을 배운 이는 상당한 수준까지 자기 조절이 가능하다. 그런 사람이 말할 때는 누구나 존경심을 갖고 집중하여 듣는다. 그의 말 하나하나는 진실하고 값진 것이기에, 사람들에게 깊이 기억될 것이다.
  진실한 사람이 맑은 마음으로 기도할 때, 그가 정말로 필요한 것들은 꼭 필요한 시기에 그에게 다가온다. 따라서 그는 원하는 것을 쫓아 헐떡일 필요가 없다. 진실 속에 확고하게 자신을 정립한 사람은 특별하게 애쓰지 않고서도 그 행위에 대한 결과를 얻는다. 모든 진실의 근원인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고, 그를 돌볼 것이다.

  ③ 아 그에야 (Asteya, 불투도): 다른 이가 가진 것을 갖고자 하고, 즐기고자 하는 욕망은 그릇된 행동을 하게 한다. 이 욕망으로부터 훔치고 싶은 충동과 그것에의 갈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 그에야, 즉 불투도는 허락 없이 다른 사람의 것을 함부로 갖는 것만 아니라, 그 사용 목적과는 달리 그것을 남용하거나 소유자가 허락한 기간을 넘겨서 사용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건 고로, 이것은 악용, 신뢰를 저버림, 과오와 오용 등을 포함한다.
요기는 만약 그가 정말로 필요치 않은 것을 끌어모으면 그 자신을 도둑이라고 여기면서 그의 물질적 요구를 최소한도로 줄인다. 다른 사람들은 부, 권력, 명예나 향락을 갈구하고 있는 반면에 요기는 단 한 가지 갈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절대 신성'에 하자는 헌신이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은 사람을 큰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욕망은 또한 고요한 흐름을 흐려 놓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천하고, 비열하고, 불구자로 만든다. '훔치지 않는다.'는 계율을 지키는 이는 모든 보물을 묻어 둘 수 있는 믿음직한 저장소가 된다.

 

 ④ 브라마 차리라 (Brahmacharya, 절제, 금욕) : 사전에 의하면, 브라 마차리 아는 금욕 생활과 종교적인 탐구와 자기 억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정액의 소모는 죽음에 이르고 그것의 보존은 삶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정액을 보존함으로써, 요기의 육체는 달콤한 향기를 머금게 된다. 정액을 보유하는 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집중된 마음의 노력으로 그것을 금하는 계율을 지켜야 한다.
  브라 마차리 아는 부정이나 강제된 엄격 또는 강제된 금지의 어느 하나도 아니다. 상 카라 차리라 Sankafacharya에 의하면, 브라 마차리 (브라 마차리 아를 실행하는 자)는 신성한 베다 Veda를 공부하는 이로 끊임없이 브라만을 향해 가고, 만물이 브라만 내가 있다고 알고 있는 자이다. 다시 말해서, 만물에서 신성을 느끼는 사람이 브라 마차리 rahmachari이다.
  하지만, 파탄잘리는 육체와 말과 마음의 절제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요가의 철학이 독신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브라 마차리 아는 그 사람이 독신자이든 기혼자이든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브라 마차리와의 고도한 사상을 일상생활에 적용해야만 한다. 해탈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거나 가정을 꾸리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경전 smrtis 은 결혼을 권장하고 있는 입장이다. 인간적인 사랑과 행복을 경험하지 않고는 신적인 사랑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고대 인도의 모든 요기들과 현인들은 대부분 결혼하여 가정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도덕적, 사회적 의무를 기피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부모가 되는 것은 신성의 사랑을 안다는 것, 행복, 지고의 영혼과의 합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정을 가진 구도자의 처신에 대해서는 「시바 상히타 Suva Samhita」에서 말하고 있다. 그를 동료들에게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수행하도록 하라. 외관상으로는 사회에 머무르나, 그의 마음만은 사회에서 떠나야 한다. 그는 직업, 신분이나 계급상의 책무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결과를 생각함이 없이 오로지 신의 도구로서 행동하게 하라.
  그는 지혜롭게 요가의 방법을 따름으로써 성공(해탈)에 이른다. 거기에 다함으로써 이(利), 불리(不利)를 초월해서 그의 감각 기능을 억제함으로써 마침내 깨달음, 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요가를 수행하는 가장은 선이나 악에 의해 물들지 않는다. 만약 그가 이웃을 보호하기 위해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죄에 물들지 않는다.
  브라 마차리 아를 이루게 되면 점차로 활동력, 힘, 용기, 강한 지성을 축적하게 되어 어떤 불의와도 당당히 대적할 수 있다. 브라마 차리는 그가 지혜로 이룬 힘을 사용할 것이다. 그는, 육체적인 힘은 ' 절대 신성'을 위하는 일을 위해, 정신적인 힘은 문화를 전파하는 데, 지적인 힘은 영적인 삶을 등장시키고 꽃 피우는 데 활용할 것이다. 브라 마차리 아는 지혜의 횃불을 당기는 불씨와 같다.

 ⑤ 아파 리그라 하 (Aparigraha, 불탐): 파리 그라 하 parigraha는 저장이나 모으는 것을 뜻한다. 모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파 리그라 하이다. 이는 단지 불투도 asteya의 또 다른 면에 불과하다. 사람이 정말로 필요치 않은 것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장 필요치 않은 것을 사 모으고 저장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은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다른 사라의 도움으로 무언가를 얻어서는 안 되는데, 이것은 영혼의 빈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요기는 물건을 모으는 것이나 저장하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약함을 의미한다고 여긴다. 그는 그 앞에 달의 모습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믿음을 지킨다. 달(月)이 없는 보름 동안에는, 사람들이 잠든 늦은 시각에 달이 뜸으로써 사람들은 그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지 못한다. 달의 광휘는 점점 줄어들지만, 그것은 그 행로를 이탈하지 않고, 사람의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달은 태양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 다시 둥근 보름달이 되고, 그때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아파 리그라 하는 따르다 보면, 요기는 그의 삶을 가능한 한 검소하게 꾸리게 되고, 심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부족함이나 손실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러고 나면, 정말 자신이 필요한 것은 저절로 꼭 알맞은 시기에 그를 찾아온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끊임없는 혼란과 좌절 그리고 그에 대한 업(業)의 반사작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평정한 마음자리를 지니기란 참으로 힘들다. 구도자는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만족할 줄 아는 능력을 개발시켜 왔다. 그건 고로, 그는 세계가 빠져들고 있는 환상과 불행의 영역을 넘어선 평화를 얻게 된다. 그는 「바가바드기타」 9장에서 크리슈나 Sri Krishna가 아르 쥬나 Arjuna에게 한 약속을 기억할 것이다.

  "오롯한 마음으로 나를 섬기고 매 순간순간 나와 조화를 이루는 이에게 나는 완전한 평온을 줄 젓이며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줄 것이며 영원토록 그들을 보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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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tta Vrtti, 마음을 동요시키는 원일들

파탄잘리의 요가 경은 기쁨과 고통을 만드는 '치타 브리티 Chita vrtti'를 다섯 가지로 분류 열거하고 있다.

 

  파탄잘리는 번뇌(Klesa)만을 일으키는 '치타 브 르 티'의 다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아비 기야(arid ya, 무지 또는  ②아 스미다(asmita,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한정시키고, 집단으로부터 구별시키고자 하는 개인적 차별 감정으로 육체적 정신적 지적 감정적일 수 있다. 
③아비니 베 샷(abhimivesa, 삶에 대한 열정과 갈망 즉 세속적인 삶과 육체적 쾌락에 대한 본능적 집착과 죽음으로 인해 이 모든 것들과 결별해야만 한다는 두려움).
  이런 번뇌(고통)의 원인은 사 타 카(Sadhaka 구도자)의 마음속에 마치 그 몸체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 빙산 덩이처럼 가라앉아 있다. 그 몸체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 빙산 덩이처럼 가라앉아 있다.
  요기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내일에 대한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영원한 현재에 오롯이 산다. 바람이 스치면서 호수의 수면을 흔들고, 거기에서 비치는 상을 일그러뜨리는 것처럼, '치타 브 르 티'는 마음의 평온을 방해한다. 호수의 잔잔한 물은 그 주위의 아름다움을 비춰 준다. 마음이 고요하다면, 자신의 아름다움은 그 안에서 투영되어 보일 수 있다. 요기는 꾸준한 정진과 욕망에서 그 자신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 마음을 안정시킨다. 요가의 8단계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1. 프라다나(Pram ana, 표준 혹은 이상 正知)
  사물이나 가치를 측정하는 마음 또는 지식으로, 인식과 같은 직접적인 증거(Pratyaksa) 추론(anumana) 권위 있는 사람의 증명이나 언질을 통해 믿을 만하고 또 확실하다고 인정된 지식이나 정보(agama)
2. 비파이라야(Viparyaya 연구 결과 판명된 오류, 倒錯)
  잘못된 가정(假定)에 근거한 그릇된 의학 진단, 종전의 천동설과 같은 것이 이 비파리와 야의 예이다.
3. 비 칼파(Vi kalpa,  어떤 사실적인 근거 없는 공상이나 상상, 分別)
  마치 거지가 엄청난 돈을 쓰고 있는 자기 자신을 상상할 때 행복을 느낀다는지 또는 인색한 부자가 자기는 가난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굶주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4. 요구라(Indra, 잠)
  사유(思維)나 체험이 배제된 상태이다. 사람이 깊이 잠들 때는 자기의 이름, 가족, 지위, 지식과 지혜, 심지어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도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이 자면서 자기 자신을 잊었을 때 그는 상쾌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잠들 때 혼란스러운 생각이 마음에 스며들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5. 스 므 르 티 (SMRT, 기억, 체험한 것의 인상을 굳게 갖고 있는 것)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인데도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슬프고 행복했던 기억들은 그들을 계속 과거에 얽매이게 하고, 거기에는 벗어날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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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ita Viksepa, 혼란스러움과 방해물

요가 수행자가 요가를 행하는 데 있어서 혼란스러움과 방해를 가져다주는 것들이다.

 

  1. 비야디 Vyadhi : 육체적 평형 상태를 방해하는 질병
  2. 스이타나 Sty ana :무기력, 일에 대한 의향의 결여
  3. 삼사야 Sam saya :의혹이나 우유부단
  4. 프로마다 Ramada :무관심이나 무감각
  5. 댈러스야 Alas ya :게으름
  6. 아비라 티 Avirati : 욕정, 감각적인 것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일어나는 끓는 욕망
  7. 브란트 다 르 셔 나 Bhranti Darsana : 그릇되거나 쓸모없는 지식이나 환상
  8. 아랍 다 북미 카트가 Alavdha Bhumikatva : 사고의 연계성 또는 집중력의 부재로 인해 현실을 지시치 못함.
  9. 아나바스티타트바 Anatashitattva : 오랜 수행 후 얻어지는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의 불안정.
  그러나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것에 네 가지가 더 있다.
① 두 칸(duhkha, 고통이나 슬픔) ② 다우로만 수야(daurmansya, 절망) ③ 안 가 메 자 야 트 바 (angamehayatva, 육체의 불안정) ④사람마다 다름 - 플러스 발사(s vasa-prasvasa, 불안정한 호흡)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 장군은 지형과 적군을 세밀히 조사하고 그 대응책을 세우듯, 요기는 수행에 의한 자기 정복의 계획을 세운다.

 

  • 브 야 디 Vyadhi : 가장 근본적인 방해 요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육체적 질병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요기에서 그의 신체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기본 도구이다. 만약 탈것이 고장 난다면, 여행자는 더 이상의 여행을 할 수가 없듯이 좋지 않은 건강으로 몸을 망친다면 수행자는 더 이상의 여행을 할 수가 없듯이 좋지 않은 건강으로 몸을 망친다면 수행자는 그가 원하는 것의 조금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육체적 건강은 정신적인 계발을 위해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음은 신경 구조를 통해서 그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병들거나 신경조직이 손상을 입으면, 마음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무디어지고, 생기가 없고, 집중이나 명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스이타나 Sty ana : 어리석고, 신의가 없고, 의심이 많은 자는 그들 자신을 망치고 있다. 그의 마음과 지성은 정체되어 둔하게 되고, 그 기능 역기 녹슬게 된다. 지속적인 흐름이 계곡물을 맑게 해 주지만, 도랑의 물은 탁하고, 득이 되는 어떤 것도 배양할 수 없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시체와 같다.
  • 삼사야 Sam saya : 어리석고, 신의가 없고, 의심이 많은 자는 그들 자신을 망치고 있다. 어떻게 그들이 현세나 내세를 즐기거나, 그 어떤 행복감이라도 맛볼 수 있겠는가? 구도자는 반드시 그 자신과 스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들이 현세나 내세를 즐기거나, 그 어떤 행복감이라도 맛볼 수 있겠는가? 구도자는 반드시 그 자신과 스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항상 신성은 그의 편이고, 악성은 결코 그에게 근접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심은 가슴속에서 용솟음치기에, 욕망, 악의, 정신적 나태, 정신적 자만과 의심은 말라 버린다. 그리고 이 방해물에서 벗어난 마음은 고요하게 되고 침착해진다.
  • 프로마다 Ramada : 광장이라고 고통받는 사람은 자기를 중시하는 형이고, 겸손함이 부족하고 자기만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옳고 그른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옳은 것에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유쾌한 것을 선택한다. 그의 이기적인 열의와 개인적인 영광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는 고의로 거리낌 없이 그의 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희생시킨다. 그런 사람은 신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 알 리스야 Alas ya : 게으름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불굴의 열정(vi rya)이 있어야 한다. 구도자의 자세는 마치 연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되 절대 절망하지 않는 자세와 같다. 희망을 방패로, 용기를 검으로 삼아 증오와 비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신심과 열의를 가지고 그는 육체와 마음의 무기력을 극복해야 한다.
  • 아비라 티 Avirati : 이것은 억제하기 몹시 어려운 감각적 대상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후에 다시 갖게 되는 크나큰 갈망이다. 요기는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는 감각 기능의 도움으로 집착 없이 감각적 대상들을 즐기는 것을 배운다. '프락치와 하라'의 수행으로 그는 집착에서 벗어나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충만하고 평정하게 된다.
  • 브란트 다 르 셔 나 Bhranti Darsana : 그릇된 지식에 사로잡힌 이는 착각으로 괴로워하며, 자기만이 진실한 빛을 보았다고 믿고 있다. 그는 엄청난 지성을 갖고 있으나 겸손함이 부족하고, 그의 지혜를 과시하고자 한다. 그는 성인들과 함께함으로써 그리고 그들의 인도를 받아 정도를 걷게 되므로 결점을 극복할 수 있다.
  • 알아보다 북미 카트가 Alavdha Bhumikatva : 산을 오르는 사람이 힘이 모자라면 정상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듯이, 집중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구할 수 없다. 그는 진리를 안 번 힐끗 볼 수는 있으나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마치 꿈속에서 천상의 음악을 들은 음악가가 깨어나는 순간 그 음악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그 꿈을 꾸지 못하는 것과 같다.
  • 아나바스티타트바 Anavasthitattva: 아나바스티타트바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은 힘든 수행으로 진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나, 그는 순수하고 강한 집중력을 갖추긴 했으나 구도의 마지막 단계에서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도 지속적인 노력이 필수적이며, 무한한 인내와 결단력으로 그 길을 추구해 가야 하며, 신성을 깨닫고자 하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게으름을 피워선 안 된다. 어느 순간 신성한 기운이 그를 감쌀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카트 우파니샤드」에서 이르기를. '자아'라는 것은 연구나 가르침, 예민한 지성이나 해박한 지식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산성을 지심으로 찾고자 하는 이, 신성이 선택한 사람만이 깨닫는 것이다. 진실로, 자아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파탄잘리는 장애 요인을 극복하고, 더없는 행복을 얻기 위한 여러 가지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최선의 것은,
① 마이트립(Maitri, 慈, 조건 없는 사랑) ②카르나(Karuna, 悲, 함께 아파함) ③무디다(Mudita, 喜, 더불어 기뻐함) ④ 우 펙 샤 (Upeksa) 사무량심(四無量心)이다.

 

  ① 많이 트리(慈)는 단순히 사랑이나 선의라는 뜻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선의의 대상이 되는 것과의 일체감(atmiyata)'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과의 일체감으로 그 자식이 성공했을 때 더없는 행복을 느끼는 것과 같다. 파탄잘리는 행복(sukha, 혹은 미덕)을 위해서 많이 트리를 권하고 있다. 요기는 많이 트리(조건 없는 사랑)와 예술미야 타를 증감시킴으로써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고 적을 친구로 만든다.

 

  ② 키루나(悲)는 다른 사람의 불행 duhkha에 연민이나 동정을 나타내고 그 절망감에 눈물을 흘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불행을 덜기 위한 행위를 수반하는 연민이다. 요기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내장된 힘(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도덕적)을 이용한다. 그는 겁쟁이가 그를 본보기로 용감하게 될 때까지 그의 용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는 적자생존의 원리를 수용하지 않고, 약한 사람이 생존할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만든다. 그는 모든 이들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③ 부디 타(喜)는 비록 그가 경쟁자일지라도 그의 '덕행이나 성공(pun-ya)'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마음이다. 부디 타를 통해서, 요기는 그 자신은 달성하지 못한 목표에 도달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성냄, 미움, 질투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심한 번민으로부터 자신을 구한다.

 

  ④ 우펙샤(捨)는 약 apunya에 빠진 사람에 대한 단순한 경멸, 무관심, 우월감은 아니다. 이는 동일한 유혹에 직면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알게 하는 자기 성찰이다. 또한, 불행한 사람이 빠진 상태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책임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성찰이고 그 후에 그를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한 시도이다. 요기는 먼저 자기 자신 속의 결점을 살핌으로써 타인의 결점들을 이해한다. 이 자기 성찰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자비로운 마음과 열린 마음을 갖게 한다.

  마이트립, 하루나, 부디 타 와우 팩 샷의 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의 함축성은 고요한 마음으로만 느껴질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고요한 마음을 얻기 위한 방법은 파탄잘리가 앞에서 언급한 8단계 중 두 가지, 즉 아사나와 푸라나 야마를 굳은 결심으로 하는 데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마음과 호흡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고, 둘 중 어느 하나가 활동하거나 활동을 멈추는 것이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파탄잘리는 정신적인 평형 상태와 내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프라나야마(호흡법)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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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서 야(Sisya)와 영적 스승(Guru) 

「시바 상히타(Siva Simhita, 하타 요가의 고전)」에서는 구도자들(sadhakas, 혹은 제자들)을 4 계층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것들은  마르누 (mrdu, 약함) ② 마더냐 마(madhyama, 보통) ③ 아디 마트라(adhima-TRA, 우수) ④ 아디 마트라 타마(adhimatratama, 최상)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최고 계층인 아디 마트라 타겠다고 만이 이 속세라는 고해를 건널 수 있다.

 

 

  ① 약한 구도자는 열의가 부족하고, 그들의 스승을 비판하고, 욕심 많고, 나쁜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고, 많이 먹고, 여자의 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정하고, 겁 만혹, 병약하고, 의타심 많고, 말을 함부로 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지고 활기가 없는 자들이다. 그루(스승이나 대가)는 그런 구도자를 만트라 요가 Mantra Yoga의 길로만 인도한다. 큰 노력을 동반함으로써, 구도자 sadhaka는 12년 후에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만트라 mantra라는 말은 사고한다는 의미를 지닌 'man'이라는 어원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만트라는 그 의리를 충분히 이해한 후 계속 반복해 주문을 외우는 기도를 뜻한다. 만트라가 약한 구도자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데는 오랜 기간이 필요하며 그 결과를 가져오기에는 더욱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② 치우침이 없고 침착한 성격의 사람으로서 고난을 참을 줄 알며, 수행을 완전히 이루려는 의지력을 갖고, 온유하게 말하고, 어떤 환경에 처해서도 결제가 가능한 자를 구도자(madhyama)'라 한다. 구르는 이런 특징을 알고, 라야 Lay 요가를 가르쳐 해탈에 이르게 한다(라야 Lay는 헌신, 전념이나 몰아 의미한다.)


  ③ 안정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라야 요가를 행할 수 있고, 활기차고, 독립적이고, 고귀하고, 자애롭고, 관대하고, 신뢰가 있고, 용감하고, 젊고, 존경할 만하고, 스승을 존중하며, 요가를 행하고자 하는 굳은 마음 상태를 가진 자를 '우수한 구도자(adhimatra)'라 한다. 그는 6년간의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구르는 이런 사람을 화젯거리여 Hath 요가로 교화한다.

  ④ 왕성한 혈기와 열의, 잘생긴 외관, 용기 있고, 경전에 능통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건전한 마음가짐, 우울하지 않고,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규칙적인 식사, 감각 기능을 제어할 수 있고, 두려움이 없고, 정결하고, 노련하고, 관용적이고,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고, 확고하고, 지적이고, 독립적이고, 너그러우며, 선한 성격을 지니고, 온유하게 말하고, 그루를 존경하는 자가 바로 '최상의 구도자(adhimatratama)'로 어떤 형태의 요가에도 적당하며, 그는 3년 만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시바 상히타」와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기간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파탄잘리는 개인의 영혼과 신성한 우주정신(Divine Universal Soul)이 하나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어디에도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에 따르면 바이라 기와(vairagya, 욕망으로부터 벗어남)가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아부 야사 abhyasa를 중단함이 없는 장기적이고도 헌신적인 노력이라고 정의하는데, 이 아파 보아야 사에 의해서 영성 계발의 견고한 기초가 만들어진다.
  요가 수행은 한정된 시간 내에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졸업장이나 학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요가를 수행함에 있어서의 장애물, 시련, 고난들은 영적 스승 Guru의 도움으로 상당한 부분까지 제거될 수 있다('GU'라는 음은 어둠을, 'Ru'라는 음은 밟을 의미하고 있다. 어둠을 걷고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이가 바로 영적 스승이다.).
  '영적 스승'이라는 말은 참으로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일반적인 지도자와는 차이가 있다. 그는 단순히 생계를 꾸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영혼의 스승이다. 그는 영혼의 지식을 전수하고, 그 영혼의 지식을 전수하는 자를 시사야 sis ya, 즉 제자라 한다.
  영적 스승과 시어서 야의 관계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부모와 자식 간, 부부간, 친우 간의 관계를 뛰어넘는다. 구르는 이기적이지 않다. 그는 명예나 이익에 끌리지 않고 궁극적인 목표로 제자를 헌신적으로 인도한다. 그는 신의 길을 보여 주고, 이끌어 줌으로써 제자가 승화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는 사랑을 통해서 자신감, 헌신, 교훈, 깊은 이해, 계몽을 불어넣는다. 그는 제자에 대한 믿음을 갖고, 제자가 그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또한 그는 제자가 질문하도록 하고, 질문과 분석을 통해 진리를 터득하게끔 끊임없이 격려한다.
  시사야 sis ya는 보다 높은 인식력과 향상이 가능한 소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는 반드시 자신감, 신심, 영적 스승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는 반드시 자신감, 신심, 영적 스승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 대표적인 영적 스승과 시어서 야의 예로는 「카트 우파니샤드」의 의미 야마(Yama, 죽음의 신)와 나 히 케 타 Nachiketa,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슈나 Sri Krishna와 아르 쥬나 Arjuna이다. 나 이렇게 타와 아르주나는 통일된 마음, 열의, 알려고 하는 마음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씻느냐는 지식을 갈망하고, 겸허한 성품,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영적 스승을 찾아선 안 된다. 그는 쉬라 다(sraddha 가져야 하고, 설사 그가 예상한 시기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절망해선 안 된다. 수없이 많은 과거 전생의 경험과 상승 카라(samsara,  , 과거의 생각과 행동의 축적된 찌꺼기)로 물들어진 헐떡거리는 마음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단순히 영적 스승의 말을 경청하는 것만 그로 시 그녀가 그 가르침에 몰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인드라 Indra와 비로 차나 Virochana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신들의 왕인 인드라와 악마의 왕자인 비로자나는 절대자에 관해 알고자, 곧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브라마 Brahma를 찾아갔다. 둘 다 그곳에 머물며 영적 스승의 말을 경청했다. 인드라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비로자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인드라의 기억 기능은 그가 그의 스승에 대한 사랑과 신심 그리고 가르침에 대한 순수한 집중으로서 발전된 것이다. 그가 영적 스승과의 일체감을 가진 것이 바로 그를 깨달음에 이르게 한 비결이다. 비로자나의 기억 기능은 단지 그의 지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그는 스승에게도, 스승의 가르침에도 몰두하지 못했다. 그는 원래 그대로의 모습, 즉 거만한 지식인으로 남아 의심으로 가득 찬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인드라는 지적 겸손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비로자나는 지적인 자만에 취해서 그가 브라마에게 가르침을 청한 그 자체가 자신을 낮춘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드라의 접근은 신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비로자나는 매우 실질적이다. 비로자나는 단순한 호기심이 동기가 되었고, 그가 훗날 권력을 장악하기에 유용하다고 믿는 실질적인 지식을 원했다.
  씻느냐는 우선 무엇보다도 사랑, 절제, 겸허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사랑은 용기를 낳고, 절제는 풍요를 낳고, 겸허함은 힘을 낳는다. 사랑이 없는 용기는 잔인함일 뿐이며, 절제가 없는 풍요로움은 방종과 부패를 가져온다. 겸허함이 없는 권력은 오만이나 독재를 부른다. 진실한 씻느냐는 영적 스승으로부터 그가 근원적 자아로 돌아갈 때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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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hana, 깨달음을 위한 길잡이

 요가에 관한 모든 지침서는 사다 나(sadhana)나 아부 야사(avhyasa, 쉼 없는 정진)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사다가는 단지 요가 지침서의 이론적인 연구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노력이다. 참깨로 기름을 짜기 위해서는 압축이 가해져야 한다. 장작이 발화하고 그 주머니에 내재해 있는 불이 댕겨져야 한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구도자는 꾸준한 수행으로 그 자신 안에 깃들여 있는 신성의 불꽃에 불을 붙여야 한다.

 


  "젊은이, 중년, 아주 나이 많은 사람, 심지어 환자 그리고 확고한 의지가 없는 사람도, 꾸준히 수행하는 자의 것이지 수행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요가의 완성, 깨달음은 단순히 이론적인 성전을 읽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요기나 은둔자(sanyasi)의 옷을 입는다거나, 요가에 대한 말만으로도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꾸준한 수행만이 성공의 비결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명백한 진리이다."
  "우리는 처음 알파벳을 배워 그것을 바탕으로 공부함으로써 모든 학문을 체득하듯, 첫 단계로 우리의 육체를 철저히 단련시킴으로써 우리는 진리 Tattva Janna, 곧 이 우주 안에 내재해 있는 지고의 영혼과 동이신 데는 인간 본연의 영혼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내적 평온을 누리고, 신성을 찾으려는 강한 열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바로 그의 육체, 감각 기능, 마음, 이성, 자아가 함께 어우러져 이루는 집중된 노력에 의해서이다.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최상의 탐험은 그의 조물주에게로 돌아가는 여행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의 육체, 감각 기능, 마음, 이성, 자아가 잘 발달하여야만 하고 또 그 기능이 함께 어우러짐이 필요하다. 만약 거기에 노력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그는 이 탐험에서 실패하게 된다.

 

 

「카트 우파니샤드」의 1부 3장에서, 야마(Yama, 죽음의 신)는 개인을 마차에다 비유함으로 요가를 구도자 나 힘 캐 타에 설명한다.

 

  "예술만(Atman 마차의 주인으로, 이성은 마부로 고삐로 알아라. 우리가 보통 말하는 감각 기능은 마차를 끄는 말들이며, 그들 욕망의 대상은 목장이다. 감각 기능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될 때, 현자들은 그 자아를 향유자(bhokfr)라고 부른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그의 마음을 고삐 잘할 수 없다. 그의 감각 기능은 날뛰는 말들과 같다. 분별력 있는 사람은 그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고, 그의 감각 기능은 길든 말들과 같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늘 산만하고, 순수하지 못하다. 그는 절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생에서 저 생으로 끊임없이 윤회를 되풀이하며 방황할 것이다. 분별력 있는 사람은 주의 깊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 절대로 환생하지 않는다. 마음의 고삐를 잘 조절하는 능숙한 마부를 마음속에 갖고 있는 이는 그 여행의 최종 지(즉 영원불멸한 영혼의 궁극 거처)에 도달한다."

"감각 기능들은 욕망의 대상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감각 기능들보다 더 강한 것은 마음이고, 마음보다 더 위의 것은 이성이며, 이성 위의 것은 바로 신성이고, 자아로 당신 자신을 교육하고, 욕망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적들을 물리쳐라."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수행만 아니라 포기하는 일까지 필요하다. 포기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가 문제시된다. 요기는 세상을 등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를 신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버린다. 그는 모든 영감과 정당한 행위가 신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 자신의 욕망을 버린다. 그는 신성의 역할을 부인하는 사람들, 악의에 찬 생각을 유포하는 사람들, 도덕적 가치의 중요성을 입으로만 부르짖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다.


  요기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신이 나 인류에게 그 행위의 결과를 바침으로써, 그 자신과 그 행위들을 연결한 끈을 끊어 버린다. 그는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만이 그의 특권이고, 그 행위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권리도 없다고 믿는다. 다른 이들은 의무를 행해야 할 때는 잠들고, 그들의 요구를 주장할 때만 깨어나지만, 요기는 그의 의무에는 항상 깨어 있고, 권리에 대해서는 잠들어 있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가 잠들 때도 수행자와 마음의 평온을 얻은 사람은 빛을 밝히기 위해 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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