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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이성이 감가가 기능에 굴복하게 되면 그 자신은 자기 상실의 상태가 된다.

반면에, 호흡조절이 바르게 이루어진다면, 욕망을 외부적인 목표를 따르기보다는 감각 기능들이 내면으로 향하게 되고, 인간은 그것들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요가의 다섯 번째 단계 즉 프 라 타 아 하 라 pratyahara라고 부르며, 이 단계에서 모든 감각 기능은 제어된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구도자는 자기 자신을 찾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매력적이지만 치명적인 관능적 욕망의 마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욕망을 만들어낸 창조주를 자기 몸속에 새김으로써 욕망에 대한 절연물이 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또한 신의 유산인 지식의 등불도 필요하다. 비닐로,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속박의 원인도 될 수 있고 해방의 원인도 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욕망의 굴레에 묶여 있다면 속박이 되고, 거기에서 벗어나 있다면 우리는 자유를 맛볼 것이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슬퍼하고, 어떤 것에 대해 불쾌해한다면 거기에는 속박이 따른다. 요기는 쾌락보다는 선을 선호한다. 그들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들은 선보다 오히려 쾌락을 추구하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놓치게 된다. 요기는 현재의 그 상태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는 언제, 어떻게 멈추어야 하는지를 알기에 평온 속에서 사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쓰디쓴 것을 택하나 중국에는 그것이 꿀처럼 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수행으로 그 쓴맛을 참고 견디게 된다. 그들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은 처음에는 꿀처럼 달아 보이는 것을 택하나 종국에는 독약처럼 쓰게 된다는 것을 모른다.


  요기는 세속적인 욕망으로 감각을 만족시키는 길은 넓지만, 그것은 결국 파멸로 인도되면,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요가의 길은 날카로운 면도날처럼 좁고, 밟고 지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뿐에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이가 거의 드물다. 요기는 파멸로 이르는 길도, 구원의 길도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힌두 철학에 의하면 의식은 세 가지의 다른 특성을 명시하고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그이 생명과 의식은 우주 전체와 함께 하나의 힘이며 동일한 프라크리트(prakri, 우주적인 물질 : Sattva, Rajas, Tamas의 세 가지 특성으로 이루어진 물질세계의 본바탕)이다.

 

구나(gynas, 특성, 속성) 들 중에서 우세한 경향에 따라 그 명칭이 달라진다. 이들 구나(특성 혹은 속성) 들은 다음과 같다.
  (1) 삼성 직무적성검사 바 (Sattva, 밝고 순수하고 선한 특성)은 명료함과 정신적 평정에 이르게 한다.
  (2) 로저스 (Rahas, 이동성과 활동적인 특성)은 개인을 적극적이고 활기차고 긴장하고, 의지적으로 한다.
  (3) 토마스 (Tamas, 어둡고 방해가 되는 특성)은 라자스탄의 작용과 사트마가 나타나는 것을 저지하고 반대로 작용하게 한다.

 

 


  타 화성 Tamas는 미혹, 불분명, 비활동적, 무지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다마스의 성질이 우세한 사람은 생기고 없고,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 사트마가 신성에 이르는 길이라 하면 토마스는 악성에 이르는 길이고, 양자 사이에 라자르가 있다. 각 개인이 가지는 신념, 취하는 음식, 행하는 헌신 행위들, 겪은 내핍 생활, 부여받은 재능은 그에 내재하는 삼성 직무적성검사 바, 로저스, 토마스 중 우세한 요인에 의해 변한다.


  신성한 쪽을 향하는 경향을 타고난 사람은 두려움이 없고 순수하다. 그는 관용다우며 자기 통제가 되는 사람이다. 그는 자아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며 비폭력적이고, 신심이 깊고, 성내지 않는다. 그는 노력에 대한 결과를 바라지 않고, 일 자체를 위해 일한다. 그는 갈망이 없으므로 그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고 모든 이웃을 향해 열린 자비로움으로 마음의 평정을 갖는다. 그는 온화하고 겸손하며 성실하다. 그리고 의식이 깨어 있으며, 관대하고, 결연하고, 불신과 자만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다.

 

 악한 경향을 타고난 사람은 잘 속이고, 거만하며, 자만에 빠져 있다. 그는 노여움, 잔인함, 무지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순수함, 정의로움, 진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한없는 욕망과 욕구를 채우려고만 한다. 무수한 욕망으로 어지러워진 상태에서, 망상의 늪에 빠지고, 감각적 쾌락의 탐닉은 그를 지옥에 이르게 한다.

 

 라도 구냐(rah-guan 성질이 우세한 사람은 갈망이 강하고 애정도 깊은 사람이다. 그는 정열적이며 탐욕적이어서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 욕정, 증오, 시기와 속임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의 욕망은 그칠 줄을 모른다. 그는 야심이 있고, 성취욕이 강할 뿐 아니라, 불안정하고, 변덕이 심하며, 쉽게 음이 산란해진다. 그는 친구의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가족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그는 불쾌한 일에는 몸을 움츠리고 유쾌한 것에만 매달린다. 그의 말에는 정이 없으며, 식탐이 많다.


 각각의 다른 구나 guan이 우세하게 지배하는 사람들의 마음 작용은 '탐내지 말라'와 같은 보편적인 계율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 접근 방법에 따라 달리 설명될 것이다.


  탈모 구나 TMAO-gum이 우세한 사람은 이렇게 해석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얻었든 간에 내 것은 탐하지 마라. 만약 내 것을 탐한다면 그들을 파멸시킬 것이다."


  라도 구나 raj-guan이 우세한 사람의 성격은 그 계율을 "남들이 나의 것을 탐하지 않는 한 나도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는 문자 그대로 수단으로써의 법을 지킬 것이지만, 원리의 문제에 입각한 법의 진정한 정신은 따르지 않는 셈이다.


  사트비카sattvika 기질을 갖춘 사람은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영원한 가치로서 원리를 중시한 법의 글자 자체의 뜻과 가르침의 정신 둘 다 지킬 것이다. 그는 정의 그 자체를 위해서 정의로운 것이지 정직하도록 강제하는 법의 처벌 때문이 아니다.


  요기 또한 인간이므로 상술한 세 가지 구나에 영향을 받는다. 자기가 추구하는 대상물 및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수행(abhyasa)'을 통해서 어떤 사상, 말, 행위들이 토마스 혹은 라자르에 어떻게 영향받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타 화성 Tamas에 의해 고무된 그러한 생각들을 제거해 버리고 그는 사 트 비 카 sattvika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삼성 직무적성검사 바 구나 sattva-guan만이 남게 되었을 때, 인간의 영혼은 드디어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크게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중력처럼 구나들 역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우주에서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기 위해 집중적인 연구와 엄격한 훈련이 필요하듯이 구도자는 구나 guan의 끌어당김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신성과의 합일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요가를 통한 훈련과 자기 성찰의 구도적 수행이 필요하다.


  일단 구도자가 신성 또는 창조의 완벽함을 경험하게 되면 감각 기능의 대상들에 대한 갈망 (갈아)는 사라지고 그 후부터는 그것들을 '욕망 없는 냉정한 마음 (vairagya)' 이로 바라보게 된다. 그는 더위와 추위, 고통과 기쁨, 명예와 수치, 덕(德)과 부덕(不德)에 있어서 동요가 없게 된다. 승리와 불행 이 두 가지를 평정한 마음으로 대한다.


  그는 이 두 개의 상반된 것들에서 자기 자신을 해방했다. 그는 이제 구나 들의 끌어당김을 넘어서서 구나 티 타(gunatita 된 것이다. 그제야 그는 생사와 고통과 비애의 틀에서 해방되어 불멸한 생명이 된다. 대우주 정신(혼)과 일체가 됨으로써 신의 완성함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것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완전에 이르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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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나 (Asana, 자세형법, 坐法)

  요가의 세 번째 단계는 아사나, 즉 요가 자세이다. 

아사나는 안정감, 건강, 수족을 가볍게 해 준다. 균형 있고, 기분 좋은 자세는 정신적인 평정을 가져다주고, 마음의 변덕스러움을 자제하게 해 준다. 아사나는 단순한 체조가 아니나. 그것은 요가 자세이다. 다른 운동은 넓은 샅과 값비싼 운동 기구가 필요하지만, 아사나를 수행하기 위해선 깨끗한 공기가 통풍되는 장소와 담요 한 장 그리고 강한 결심이 필요하다.

  아사나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있으며 할 수 있으며, 팔과 다리를 써서 필요한 무게를 지탱하고 균형을 잡는다. 아사나를 수행함으로써, 민첩성, 균형감, 인내력, 왕성한 활동력을 계발시킨다. 아사나는 육체의 모든 근육, 신경, 분비샘(腺)을 운동시키기 위해서 수 세기 동안 발전되어 왔다. 아사나는 근육이 굳지 않고 강하고 탄력 잇는 훌륭한 체격을 보장해 주고 병으로부터 육체를 보호한다. 또한 아사나는 피로를 없애 주고 신경을 진정시킨다. 그러나 아사나의 실질적인 중요성은 몸의 훈련을 통해서 마음이 닦아지는 데 있다.

 

  많은 배우, 곡예사들, 육상 선수들, 무용수들, 음악가들, 운동가들은 뛰어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고, 육체를 조절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자아를 다루는 능력은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그들 자신과의 부조화를 이루며, 그들 중 균형 잡힌 인경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종종 육체를 무엇보다도 중시한다. 요기는 그의 육체를 경시하지 않으며, 단순히 완벽한 육체만이 아니라 감각, 마음, 지성과 정신의 완벽함을 함께 추구한다. 요기는 아사나의 수행으로 육체를 정복하여, 정신 수행에 적합한 수단이 되도록 한다. 그는 육체는 정신을 위해 필요한 도구임을 안다. 육체가 없는 정신은 날개를 잃어버린 새와 같다.


  요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우리의 몸뚱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행하면서 통행료는 지불하듯 스러져 가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쉼 없이 변해 가는 유년기, 청년기, 노년기에 따라 그때그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육신의 나고 죽음은 자연적 현상이지만 영혼은 나고 죽음에 상관없다. 마치 우리가 다 떨어진 겉옷을 벗어던지고 새 옷을 입듯, 영혼은 늙고 병든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택하는 것이다.

 

  요기는 '절대 신성'이 그에게 준 이 육체가 개인의 쾌락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매 순간순간 이웃들에게 베풀어 주기 위해 있는 것임을 믿는다. 그는 자기의 육체를 자기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육체를 준 '절대 신성'이 어느 날 그의 몸을 다시 거둘 사실을 알고 있다.


  아사나를 행함으로써 구도자는 먼저 건강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건강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단순히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힘든 노력으로만 얻어지는 가치 있는 것이다. 육체와 마음과 영혼의 완전한 평형 상태이다. 몸도 마음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은 자연의 상태를 건강이라 한다. 요기는 아사나를 행함으로써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 혼란 상태에서 벗어난다. 그는 이 세상에 대해 봉사하는 것에 의해 그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를 '절대 신성'에 돌린다.


  요기는 그의 삶과 모든 활동이 사람의 형태를 빌려서 이루어 내는 본래 신의 행위의 역할임을 깨닫는다. 그의 맥박과 호흡의 리듬 속에서 계절의 흐름과 우주적 삶의 고동을 알게 된다. 그의 육체는 신성이 머무르고 속에 잊고 속에 잊고 속에 잊고 있는 사원이다. 그는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과 육체를 신성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육체가 우주적인 생명의 일부분임을 망각하고 부정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육체의 요구는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신성의 요구이다. 요기는 신을 찾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데, 그는 신은 안타라스만 (Antaratma, 내적 자아)로 알려진, 자신 속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신의 왕국이 자신을 감싸고 있음을 느끼고 하늘이 자기 자신 속에 있음을 알고 있다.


  육체가 끝나고 마음이 시작하는 곳은 어디인가? 마음이 끝나고 영혼이 시작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것들은 내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똑같이 신성한 의식으로 전체에 퍼져 있는 다른 양상이므로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 요기는 결코 몸과 마음으로 소홀히 하지 않고 둘 다 소중하게 여긴다.


  그에게 있어서 몸은 그의 정신적 해탈에 방해가 되는 것도, 그것을 저하하는 요인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해탈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다. 그는 '절대 신성'을 성김에 있어 헌신적으로 봉사하기 위해서 천둥 번개만큼 강하고, 건강하고, 고통이 없는 몸을 갖고자 한다.


  「문다. 키 우파니샤드 mundaiopanisad」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강직함이 없고, 무분별하고, 목표가 없는 사람은 자아를 이룰 수 없다. 굽지 않는 토끼는 물속에서 풀어지듯이 육체도 곧 쇠퇴한다. 그런 연유로, 육체를 정화하고 강하게 하기 위해서 요가적 수행의 불꽃으로 단단히 그것을 구워야 할 것이다.

  아사나의 이름들은 각각 의미를 내포하고, 논리적 진화의 추이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것들은 나무 VRSA와 연꽃 pad ma 같은 식물의 이름을 본떠서 이름 지어졌고, 어떤 것은 메뚜기 salabha와 전갈 vischika 같은 곤충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또, 물고기 mats ya, 거북 kurma, 개구리 (bheka 또는 manduka), 악어 NARA와 같은 수생동물과 양서류를 본떠서 이름 지어진 것도 있다. 또 수탉 kukkuta, 왜가리 Baka, 공작 Mayra, 백조 ha SMA, 사자 sima와 같은 네발짐승을 따서 이름 지은 것도 있다. 뱀 bhujanga과 같은 기어 다니는 동물들도 잊지 않았고 인간의 태아 상태도 간과하지 않았다.


  비라 바드라 Virabhadra와 같은 전설적인 영웅과 바람 신의 아들 하누만 Hanuman의 이름을 딴 아사나도 있다. 바라도 바자 Visvamitra, 카피라 Kaila, 바리스타 Vasistha와 버스 바 미트라 Visa Mitra 같은 현인들은 그들의 이름을 딴 아사나를 통해서 기억된다. 일부 아사나는 힌두 신전의 신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아바타 라디오스타 Avatars 즉 화신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아사나를 행하는 동안 요기의 육체는 다양한 생물체의 모습을 닮게 된다. 그의 마음은 어떤 생물체도 무시하지 않도록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생물체- 가장 열등한 곤충으로부터 가장 완전한 현인까지 모든 피조물의 형상을 취하는 우주정신(대우주의 氣)을 다 같이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최상의 형태는 '무형'이라는 것을 앎으로써, 그는 보편성 속의 통일성을 발견한다. 진정한 아사나는 '브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또 끊임없이 구도자의 마음속에 흐르는 것이다.


  얻고 잃음, 이기고 짐, 명예와 수치, 육체와 정신, 마음과 영혼과 같은 이원성은 아사나 같은 사람들의 완전한 체득을 통해서 모두 사라져 버리고, 구도자는 요가의 네 번째 단계인 광장이야말로 나아가게 된다. 프라다야 마의 수행에서 활발하게 이용되는 신체의 유일한 부분들은 콧구멍, 코의 통로, 점막, 기관, 폐, 횡격막이다. 이것들만 생명의 숨결인 프라다 prana의 완벽한 영향을 느낀다.


  그러므로 생명 그 자체를 다루고 있으므로 푸라나 야마를 서둘러서 완전히 체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의 올바르지 못한 수행은 호흡기의 질환을 일으키고 신경 조직을 파괴한다. 요가 수행자는 올바른 후라나 야마 수행에 의해 대부분의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혼자서 푸라나 야마를 익히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제자의 육체적 특성을 잘 파악한 영적 스승의 개별 지도를 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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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단계 니 야마 (Niyama, 勌戒, 예행에 의한 자기 정화)

야마(금계)의 적용은 보편적이지만, 네 야마는 개인적인 수행에 적용하는 행동 규율이다. 파탄잘리가 말하는 다섯 가지 네 야마는, (1) 사우나(Sacha, 신체의 청결) (2) 산 토사(samtisa, 만족) (3) 타파스 (tapas, 고행) (4) 속도야 (svadhyaya, 성전을 통한 자아 교육) (5) 이수 바라 슬이라니 다나 (Is vara pranidhana.

 

① 사우 차 Sacha: 신체의 청결은 행복의 필수 요건이다. 외관상으로 목욕과 같은 좋은 습관이 신체를 깨끗하게 하지만, 아사나와 프라다 야마는 내면적인 청결을 가져다준다. 아사나의 수행은 전 육체를 정상적으로 조절해 주고 지나친 방임으로 야기된 독소나 불순물을 제거한다. 푸라나 야마는 폐를 깨끗이 하고, 피에 산소를 공급하며, 신경을 정화한다. 그러나 육체의 물리적 정화조 다 더 중요한 것은 증오, 격정, 분노, 욕망, 탐욕, 기만, 자만과 같은 감정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맑지 않은 생각 속의 지성 buddhi를 정화하는 것이다. 마음속의 더러움은 박이 불꽃으로 태워 버려야 한다. 이런 내면 정화에 의해서 빛과 기쁨을 준다. 그것은 자비심 saumanasya을 가져다주고, 정신적인 고통, 우울, 비해 와 절망 daurmanasya을 몰아내 준다. 사람이 자비로울 때, 그는 단순히 다른 이들이 갖고 있는 잘못만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가 갖고 있는 덕(德)까지도 볼 수 있다. 타인의 덕성(德性)을 존경하는 마음은 그 자신을 존경할 수 있게 만들고 또 자신의 슬픔과 역경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음이 맑으면 '한곳에 집중 (ekagra)' 하기 쉽다. 이 집중으로 사람이 '감각 기능을 조절 (indri ya-jay)' 하게 된다. 귀리고 나면 사람은 자기 육체라고 하는 사원에 들어갈 준비가 되고, 마음의 거울로 자신의 참모습을 본다. 몸, 생각, 말의 청정 외에 깨끗한 음식 역시 필수적인 것이다. 음식을 준비함에 있어서의 청결함 외에도 그것을 취하는 수단의 청결함 역시 필수적인 것이다.
  평생을 통해 우리를 지탱해 주면서 동시에 소모되는 물질, 그 음식물은 단순한 식물(食物) 이라기보다는 브라만, 즉 우주 순환 원리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 입 한 입 먹는 것이 '절대 신성'을 섬기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음식이 청결해진다. 채식주의자냐 아니냐는 철저히 개인적인 문제인데, 개개인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의 전통과 습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가 수행자는 오롯한 집중력과 영적 계발을 위해서 반드시 채식주의를 채택해야 한다.
  음식은 건강, 체력, 에너지와 삶을 증진할 목적으로 취해져야 한다. 그것은 담백하고, 영양가가 많고, 신선하고, 자극성이 없어야 한다. 시고, 쓰고, 짜고, 맵고, 타고, 상하고, 맛이 없고, 소화가 잘 안 되고, 청경 하지 않은 음식은 피한다. 우리가 먹는 먹거리와 섭취 방식이 그 사람의 인성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다기보다는 먹기 위해 살고, 배고프지 않은 상태에서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만약 우리가 혀의 구미에 따라먹는다면, 과식으로 우리의 소화기관은 이상이 생길 것이고 그로 인해 고통받을 것이다. 요기는 조화를 신봉하고, 그래서 그는 몸을 유지할 목적으로만 먹는다. 또 너무 많아도, 너무 적게도 먹지 않는다. 그는 자기 육체를 영혼의 쉼터로 여기고 자신이 태만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음식 외에도 장소 역시 수행을 위해선 중요한 사항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나 숲, 혼잡한 대도시, 즉 소란한 곳에서 수행은 쉽지 않다. 우리는 먹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고, 곤충이 없고, 폭풍우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선택해야 한다. 호수나 강의 둑 같은 곳이나 해변이 이상적인 곳이다. 그러나 그런 조용하고 이상적인 장소는 현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 방 한 귀퉁이에 수행 장소를 정해 깨끗하고 공기가 잘 통하고, 건조하고, 해충이 없게 한다.

 

② 산 토사 Santos: 산 토사 즉 만족(충족감)은 계발돼야 한다. 만족스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집중할 수 없다. 요기는 어떤 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음에 자연히 만족하게 된다. 만족은 요기에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신의 사랑을 알고, 그의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기쁨을 아는 자는 축복받은 자이다.
  만족(충족감)과 평온은 마음의 상태인데 인종, 신조, 부와 학식에 따라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부조화를 낳고, 사람을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갈등을 야기시킨다. 그러면 마음은 '오롯한 집중력(ekagra)'을 잃게 되고 마음의 평화마저 빼앗긴다. 영혼의 불꽃이 욕망의 바람으로 흔들리지 않을 때 평온과 만족이 있다. 구도자는 죽은 자의 텅 빈 평온이 아니라 신에 의지하여 확고히 형성된 이성을 가진 자의 평온을 추구하는 것이다.
 

③ 타파스 Tapas: 불꽃을 일으키다, 타다, 빛나다, 고통받다, 연소한 다를 의미하는 어근 'tap'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여건 속에서도 인생의 명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타는 듯한 열정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화, 자기 제어, 고행의 의미를 내포한다. 인격 형성을 위한 이 모든 것을 타파스의 수행으로 간주할 수 있다.
 타파스는 신성과의 일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고 이 목표를 향해가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욕망을 태워 버리려는 의식적 노력이다. 가치 있는 목표는 삶을 계몽시키고, 정화, 신성하게 한다. 그런 목표가 없다면, 행위와 기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타파스가 없는 삶은 사랑이 없는 가슴과 같다. 타파스가 없다면, 마음은 '절대 신성'에 도달할 수 없다.
 타파스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육체 Kayika, 언어 vachika, 마음 mana sika와 관련된 것이다. 금욕 brahmacharua과 비폭력 ahimsa는 육체의 타파스이다. 공격성이 없는 말을 하고, 신성을 찬미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결과와 관계없이 진실을 말하고, 남을 헐뜯지 않는 것이 언어의 타파스이다.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마음의 평정을 이루고 자신을 조절할 수도 있으며, 고요한 마음자리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음의 타파스이다. 이기적인 동기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들풀 한 잎이라도 신의 뜻 없이는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굳은 신심으로 행동하는 것이 타파스이다. 요기는 타파스를 통해 강인한 육체와 마음 그리고 인성을 향상한다. 그는 용기와 지혜, 성실, 강직성과 순박함을 얻게 된다.

 

④ 스바 그야 (Svadhyaya, 성전을 통한 자아 교육)
스바 SA는 자아를 의미하고, 아들 야야 adhyaya는 교육이나 연구를 의미한다. 교육은 사람 속에 있는 최상의 것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보다 야야는 자아의 교육인 것이다.
  그보다 야야는 강사가 무지한 청중 앞에서 자기 지식을 늘어놓는 강의를 듣는 것과 같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다. 그보다 야야는 연사와 청중이 한마음이 되고, 서로 사랑과 존중을 가지게 된다. 설교는 있을 수 없고, 가슴과 가슴이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 바 등 야 야로부터 일어나는 고상한 생각은 그의 혈관을 타고 흘러 그의 삶과 존재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 바 등 야 야를 수행하는 사람은 삶이라는 자신의 책을 읽음과 동시에 그 책을 만들고 수정한다. 인생관이 바뀌게 되고, 그는 모든 만물이 향락 boga보다는 오히려 박이(신심 또는 헌신) 을을 위해 존재함을 깨닫게 시작한다. 즉, 만물은 신성하고, 그 자신 안에 신성이 있고, 그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우주를 움직이는 것과 똑같은 에너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비노바 바베 (Sri Vinoba Have, 부담 boodan운동의 지도자)에 의하면, 그보다 야야는 수많은 주제나 행위의 기초 또는 근간이 되는 주된 주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인생을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서, 맑은 장소에서 신성한 학문을 정규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세계의 성전을 공부하는 것은 구도자에게 집중력을 주고, 인생의 험난한 문제들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무지를 끝내고 지식을 가져다준다. 무지는 시작은 없지만 끝은 있다. 지식은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그 바 등 야 야 구도자는 그의 영혼 실체를 알게 되고, 신성과의 영적 교감을 얻게 된다. 세계의 성전은 모든 이가 읽을 수 있다. 이는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마치 꿀벌이 여러 가지 꽃에서 꿀을 모으는 것처럼, 구도자는 각각 다른 믿음 속에 있는 것을 흡수하여 자신의 신심을 더욱 굳건히 안다. 
  언어학은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의 체계적 학문으로, 그것을 공부하는 것은 그 언어를 더 잘 이해하고 체득할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요가 자체가 종교가 아니고 '종교적 수행의 한 형태'로 그것의 연구를 통해 구도자는 자신의 신심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⑤ 이수 바라 프라이 다나 [Is vara pranidhana, 자재임(절대 시성)에 대한 헌신(신심)]
자신의 행위와 의지를 절대 신성에 바치는 신심이 이수 바라 파랗습니다. 나이다. 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이는 절망하지 않고, 스스로를 밝힐 수 있다. 만물이 절대 신서에 속해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만심으로 득의양양하지 않고, 권력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며 오직 신심으로 머리를 숙인다.
  박이 물결이 마음의 터빈을 통해서 흐르게 될 때, 그 결과 정신적 힘과 영혼의 밝힘을 가져오는 것이다. 박 티 bhakti 없는 단순한 육체적 힘은 치명적이고, 인격의 힘은 없는 숭배는 진정제와 같은 것이다. 쾌락의 탐닉은 힘과 영광을 파괴한다. 그들이 쾌락 추구에 따른 감각 기능의 만족에서 쾌락에 매달리게 되고 또 되풀이하고 싶은 욕심이 일어난다.
  만약 감각 기능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고뇌 Soka 가 있을 따름이다. 그것들은 지식과 자제로써 억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을 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서도 성취하지 못했을 때 비로소 모든 힘의 원천인 ' 절대 신성'에 도움을 구한다. 이때가 바로 박치가 우러나는 단계이다. 이 우러나는 단계에서 마음, 지성, 의지는 '절대 신성'에 굴복하고, 구도자는 기도한다. '진성, 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나니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다른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거나 이루기 위해서 기도한다. 헌신적인 마음의 상태나 진정한 사랑의 마음에는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을 곳이 없다.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관명이 사라질 때 개인의 영혼은 완전한 성숙 단계에 이른다.
 개인의 욕구 충족에 대한 욕망이 사라질 때, 마음은 '절대 신성'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할 것이다. 개인의 욕구 충족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진 마음일 때는 욕망의 대상에 그의 마음이 끌려다니는 위험성이 있다. 욕망을 비우지 않는 마음으로 박치를 실천하려는 시도는 젖은 나무로 불을 피우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연기만을 가득 피워 불을 지피려는 이와 그 주변 사람들이 눈물을 쏟게 한다. 욕망이 있는 마음은 불이 붙어 작렬할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 지식이라는 불로도 빛이나 온기를 만들 수 없다.

 
 '절대 신성'은 어둠을 밝히는 태양과 같다. 달은 태양과 마주하고 있을 때 만월이 된다. 개인의 영혼은 '절대 신성'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완전함 purnata을 경험한다. 만약 지구의 그림자가 보름달과 태양 사이에 온다면, 그것이 바로 일식이다. 내가 경험한 완전함에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그늘을 지우면 마음의 평온을 얻고자 애쓴 구도자의 모든 노력이 헛되어진다. 행동은 말보다 더 잘 그의 인성을 비춰 주고 있다. 요기는 '절대 신성'에 사진의 모든 행동을 헌신하는 기술을 배웠고, 그 행동들이 그 속에서 신성을 비춰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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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단계 야마 (Yama, 禁氣 전 인류에 고통되는 보편적 도덕률)

제1단계는 야마 (윤리적인 계율들), 즉 신조, 국가, 연령과 시대를 초월한 계율들로, ① 아 힘 사(ahimsa, 비폭력, 불상 생) ②시트야(satay, 진실, 불망의) ③ 아 그에야 (asteya, 不偸盜) ④ 브라 마차리야 (brahmacharya, 절제, 금욕) ⑤ 아파 리그라 하 (aparigraha, 不貪)이다.

  이 계율들은 사회와 개인에 대한 도덕규범으로서 만약 지키지 않는다면 혼란, 폭력, 거짓, 도벽, 방탕, 탐욕 등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악의 근원은 바로 탐욕과 집착 등의 감정들인데 단지 그 정도가 적을 수도, 중간일 수도, 과다할 수도 있다. 그것들은 단지 고통과 무지를 가져다줄 뿐이다. 파탄잘리는 야마의 다섯 가지 계율로서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이 악의 근원들을 파헤치고 있다.

 

 

  ① 아 힘 사 (Ahimsa, 비폭력, 불살생) : 부정관사인 부정을 의미하는 'a' 살생이나 폭력을 의미하는 명사인 'hims'의 합성어이다. 그러나 단순히 살생하지 말라는 부정의 명령보다는 사랑이라는 긍정적이고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사랑은 우리가 같은 어버이 Lord를 가진 자식들이기 때문에 모든 생물체를 포용하고 있다.
  요기는 사물을 파괴하거나 생명체를 죽이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한다. 인간들은 보통 먹이를 구하거나 또는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살생한다. 그러나 단지 그가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그가 체질상 비폭력주의자나 요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요가의 수행에 있어서 채식 식이요법이 필수적인 것은 사실이다. 잔인한 폭군이 채식주의자일 수 있으며, 하여튼 폭력은 먹거리의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도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칼은 과일을 깎기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고 적을 찌르기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은 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자에게 있다.
  사람은 그 자신의 이익 즉 자기 육체, 그가 사랑하는 것들, 그들의 재산이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다. 그가 혼자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사람은 모든 힘의 원천인 절대 신성을 의지함으로써 어떠한 악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폭력은 두려움, 나약함, 무지와 불안해서 나온다. 이것을 제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인생관을 바로잡고 마음을 재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폭력은 인간이 그들의 믿음을 무지와 미신보다 오히려 현실과 탐구에 바탕을 두고 있을 때 반드시 쇠퇴하게 마련이다.
  요기는 모든 생명체에는 고유한 삶의 몫이 있고 그 자신만큼 똑같이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는 타인을 독기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를 애정이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요기는 자기 삶이 타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행복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긴다. 그는 자기 행복보다 다른 이들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고, 그가 만나는 모두에게 기쁨의 원천이 된다. 마치 부모는 어린아이가 첫걸음마를 뗄 때 요기를 주듯이, 요기는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그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정의를 요구한다. 반면에 우리들 자기 잘못에는 자비와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요기는 그 자신에 의한 잘못에 대해서는 정의를 구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요기는 그 자신에 의한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한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고 그것을 가르친다. 항상 자신이 완벽에 이르도록 정진하면서 가없는 사랑과 연민으로 그들의 삶을 향상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준다.
  요기는 죄인이 범한 죄는 미워하되 그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 그는 죄인이 범한 행위에 대해서 처벌하기보다는 참회하도록 한다. 죄는 미워하되 죄를 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마치 주정뱅이의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되 그 주벽은 미워하는 것과 같다. 악행에 대한 사랑이 없는 미움은 폭력을 부른다. 또, 악행을 책하는 마음 없이 그저 사랑만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결국 불행에 이르게 된다. 요기는 죄인 속에 들어 있는 악과는 싸우면서 그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 올바른 길임을 알고 있다. 그가 사랑으로 맞선 싸움은 반드시 이긴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자식의 나쁜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서 매를 들듯이, 진실한 아 힘 사의 실행자는 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적을 사랑한다.
  아힘사를 따르다 보면 어느새 아바야 (abaya, 두려움으로부터의 벗어남)과 아크로 이른다. 두려움 없는 삶은 단지 순수한 삶을 영위하는 자들에게 온다. 요기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아무것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자신을 살피는 수행이 그를 맑게 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사람을 덮쳐 마비시킨다.
  사람들은 미래, 미지의 것,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생계 수단, 부와 명예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을 죽음에 대한 공포다. 요기는 그 자신과 영혼이 잠시 머무르는 집과 같은 육체가 별개의 것임을 안다. 그는 자신 속에서 만물을 보고 또 만물 속에서 자신을 보기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병들고, 늙고, 쇠약해지고,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는 유리들 육식이지만 영혼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요기에 죽음은 삶에의 열정을 불어넣는 자극제와도 같다. 그는 '절대 신성'에 그의 마음, 이성, 그의 전 인생을 바쳐 오고 있다. 그의 모든 것이 '절대 신성'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분노 Krdkha 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마음을 타락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성숙에 연결되는 분노이다. 전자의 바탕에는 자만심이 깔려 있어 사소한 것에도 우리를 성나게 한다. 이것은 마음이 올바른 견해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이와는 반대로, 요기는 그의 내면이 비루해지고, 그의 경험과 학식이 그를 어리석음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할 때 자신에게 화를 낸다. 그는 그 자기 잘못을 다룰 때는 매우 엄격하지만 매우 곤 용적이고 유하다. 마음의 온화함은 요기의 특별한 성품이고, 그의 마음은 모든 고통을 녹인다. 요기의 마음속에는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타인에 대한 관용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서 요기가 있는 곳에서는 모든 적의가 사라지고 만다.

 

② 시트야 (Satya, 진실, 불망의): 우리 행동이나 도덕규범의 최고봉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실은 신 God이고 신은 곧 진실이다.'라고 했다. 불이 불순물을 태우고 금을 정제하는 것처럼, 진실의 불꽃은 요기를 정화하고 그 안에 있는 불순물을 없애 준다. 만약 마음이 진실을 생각하고, 혀는 진실을 말하고 삶 전체가 진실 위에 있다면, 인간은 신과 드리던 결합할 수 있게 된다.
'실체' 그 본질은 사랑과 진실로서, 이 두 가지 면을 통해서 실체를 나타낸다. 요기의 삶은 이 실체의 두 가지 면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아 힘 사(비폭력)가 요구되는 것이다. 사느냐는 생각(思), 말(言), 행동에 있어서 완전한 진실성을 전세로 한다. 어떤 형태 로든지의 거짓은 구도자를 진실의 근본 법칙에서 벗어나게 한다.
  진실은 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말에는 네 가지 죄악이 있다. 악성과 망에, 기어, 양설이나 다른 사람이 중하게 여기는 것을 무시하는 것들이다. 소문을 꾸며내는 사람은 뱀보다 더 사악하다. 말을 삼가서 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악의를 뿌리째 뽑아 버리게 한다. 누구에게도 적의를 품고 있지 않을 때, 마음은 모든 이들에 대한 자비로 가득 찬다. 자신의 혀를 조절하는 법을 배운 이는 상당한 수준까지 자기 조절이 가능하다. 그런 사람이 말할 때는 누구나 존경심을 갖고 집중하여 듣는다. 그의 말 하나하나는 진실하고 값진 것이기에, 사람들에게 깊이 기억될 것이다.
  진실한 사람이 맑은 마음으로 기도할 때, 그가 정말로 필요한 것들은 꼭 필요한 시기에 그에게 다가온다. 따라서 그는 원하는 것을 쫓아 헐떡일 필요가 없다. 진실 속에 확고하게 자신을 정립한 사람은 특별하게 애쓰지 않고서도 그 행위에 대한 결과를 얻는다. 모든 진실의 근원인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고, 그를 돌볼 것이다.

  ③ 아 그에야 (Asteya, 불투도): 다른 이가 가진 것을 갖고자 하고, 즐기고자 하는 욕망은 그릇된 행동을 하게 한다. 이 욕망으로부터 훔치고 싶은 충동과 그것에의 갈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 그에야, 즉 불투도는 허락 없이 다른 사람의 것을 함부로 갖는 것만 아니라, 그 사용 목적과는 달리 그것을 남용하거나 소유자가 허락한 기간을 넘겨서 사용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건 고로, 이것은 악용, 신뢰를 저버림, 과오와 오용 등을 포함한다.
요기는 만약 그가 정말로 필요치 않은 것을 끌어모으면 그 자신을 도둑이라고 여기면서 그의 물질적 요구를 최소한도로 줄인다. 다른 사람들은 부, 권력, 명예나 향락을 갈구하고 있는 반면에 요기는 단 한 가지 갈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절대 신성'에 하자는 헌신이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은 사람을 큰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욕망은 또한 고요한 흐름을 흐려 놓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천하고, 비열하고, 불구자로 만든다. '훔치지 않는다.'는 계율을 지키는 이는 모든 보물을 묻어 둘 수 있는 믿음직한 저장소가 된다.

 

 ④ 브라마 차리라 (Brahmacharya, 절제, 금욕) : 사전에 의하면, 브라 마차리 아는 금욕 생활과 종교적인 탐구와 자기 억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정액의 소모는 죽음에 이르고 그것의 보존은 삶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정액을 보존함으로써, 요기의 육체는 달콤한 향기를 머금게 된다. 정액을 보유하는 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집중된 마음의 노력으로 그것을 금하는 계율을 지켜야 한다.
  브라 마차리 아는 부정이나 강제된 엄격 또는 강제된 금지의 어느 하나도 아니다. 상 카라 차리라 Sankafacharya에 의하면, 브라 마차리 (브라 마차리 아를 실행하는 자)는 신성한 베다 Veda를 공부하는 이로 끊임없이 브라만을 향해 가고, 만물이 브라만 내가 있다고 알고 있는 자이다. 다시 말해서, 만물에서 신성을 느끼는 사람이 브라 마차리 rahmachari이다.
  하지만, 파탄잘리는 육체와 말과 마음의 절제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요가의 철학이 독신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브라 마차리 아는 그 사람이 독신자이든 기혼자이든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브라 마차리와의 고도한 사상을 일상생활에 적용해야만 한다. 해탈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거나 가정을 꾸리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경전 smrtis 은 결혼을 권장하고 있는 입장이다. 인간적인 사랑과 행복을 경험하지 않고는 신적인 사랑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고대 인도의 모든 요기들과 현인들은 대부분 결혼하여 가정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도덕적, 사회적 의무를 기피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부모가 되는 것은 신성의 사랑을 안다는 것, 행복, 지고의 영혼과의 합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정을 가진 구도자의 처신에 대해서는 「시바 상히타 Suva Samhita」에서 말하고 있다. 그를 동료들에게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수행하도록 하라. 외관상으로는 사회에 머무르나, 그의 마음만은 사회에서 떠나야 한다. 그는 직업, 신분이나 계급상의 책무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결과를 생각함이 없이 오로지 신의 도구로서 행동하게 하라.
  그는 지혜롭게 요가의 방법을 따름으로써 성공(해탈)에 이른다. 거기에 다함으로써 이(利), 불리(不利)를 초월해서 그의 감각 기능을 억제함으로써 마침내 깨달음, 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요가를 수행하는 가장은 선이나 악에 의해 물들지 않는다. 만약 그가 이웃을 보호하기 위해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죄에 물들지 않는다.
  브라 마차리 아를 이루게 되면 점차로 활동력, 힘, 용기, 강한 지성을 축적하게 되어 어떤 불의와도 당당히 대적할 수 있다. 브라마 차리는 그가 지혜로 이룬 힘을 사용할 것이다. 그는, 육체적인 힘은 ' 절대 신성'을 위하는 일을 위해, 정신적인 힘은 문화를 전파하는 데, 지적인 힘은 영적인 삶을 등장시키고 꽃 피우는 데 활용할 것이다. 브라 마차리 아는 지혜의 횃불을 당기는 불씨와 같다.

 ⑤ 아파 리그라 하 (Aparigraha, 불탐): 파리 그라 하 parigraha는 저장이나 모으는 것을 뜻한다. 모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파 리그라 하이다. 이는 단지 불투도 asteya의 또 다른 면에 불과하다. 사람이 정말로 필요치 않은 것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장 필요치 않은 것을 사 모으고 저장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은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다른 사라의 도움으로 무언가를 얻어서는 안 되는데, 이것은 영혼의 빈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요기는 물건을 모으는 것이나 저장하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약함을 의미한다고 여긴다. 그는 그 앞에 달의 모습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믿음을 지킨다. 달(月)이 없는 보름 동안에는, 사람들이 잠든 늦은 시각에 달이 뜸으로써 사람들은 그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지 못한다. 달의 광휘는 점점 줄어들지만, 그것은 그 행로를 이탈하지 않고, 사람의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달은 태양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 다시 둥근 보름달이 되고, 그때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아파 리그라 하는 따르다 보면, 요기는 그의 삶을 가능한 한 검소하게 꾸리게 되고, 심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부족함이나 손실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러고 나면, 정말 자신이 필요한 것은 저절로 꼭 알맞은 시기에 그를 찾아온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끊임없는 혼란과 좌절 그리고 그에 대한 업(業)의 반사작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평정한 마음자리를 지니기란 참으로 힘들다. 구도자는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만족할 줄 아는 능력을 개발시켜 왔다. 그건 고로, 그는 세계가 빠져들고 있는 환상과 불행의 영역을 넘어선 평화를 얻게 된다. 그는 「바가바드기타」 9장에서 크리슈나 Sri Krishna가 아르 쥬나 Arjuna에게 한 약속을 기억할 것이다.

  "오롯한 마음으로 나를 섬기고 매 순간순간 나와 조화를 이루는 이에게 나는 완전한 평온을 줄 젓이며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줄 것이며 영원토록 그들을 보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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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바카(Kumbhakas, 호흡의 보유 혹은 억제)

  • 세 개의 반대, 즉 잘한다고 반대, 붇다 아나 반대, 물라 반대는 뒤에서 설명된 것처럼 쿰바카(Kumbhakas, 완전히 들이쉰 후에 호흡을 보유하거나 완전히 내뱉고 난 후 호흡을 억제하는 것) 상태에서 관찰돼야 한다. 반대 band has는 쿰바카를 행하는 동안 닫혀 있어야 하는 안전밸브와 같다.
  • 들숨 P ur aka와 날숨 rechaka의 수행은 안타라 쿰바카(antarakumbhaka, 숨을 들이마시고 난 뒤의 호흡 보유)를 배우기 전에 반드시 완전히 체득해야 한다.
  • 바야 쿰바카(Baht kumbhaka, 숨을 내쉰 뒤의 억제)는 안타라 쿰바카가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시도해서는 안 된다.
  • 쿰바카 수행하는 동안 호흡 보유 기간을 늘리기 위해서 횡격막과 복부 조직을 죄었다 늦추었다 할 뿐만 아니라 공기를 빨아들이는 경향도 있다. 이것은 무의식적이며 무 의도적이다. 이런 경향을 피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각 들숨과 날숨 후에 호흡을 보유 kumbhaka 하기가 힘들며 몇 사이클(순환)의 심호흡을 하고 나서 쿰바를 한다. 예를 들면, 세 번 심호흡하고 한 번 쿰바카를 한다. 그리고 다시 세 번 심호흡하고 두 번째 쿰바카를 한다. 등등··· ···.
  • 만약 들숨 또는 날숨의 리듬이 쿰바카(지식)로 흐트러진다면 쿰바카의 지속 기간을 줄인다.
  • 눈과 귀의 병(녹내장이나 귀의 고름 같은)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지식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 때로는 변비가 쿰바카 수행의 초기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질 것이다.
  • 1분 동안의 정상적 호흡수는 15회이다. 그러나 몸이 소화불량, 열감기나 공포, 화, 욕망과 같은 감정에 의해 나빠질 때 이 숫자는 올라간다. 정상적 안녕 호흡수는 24시간에 21,600번을 들이쉬고 내쉰다. 요가 수행자의 일생은 날짜의 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호흡의 수에 의해 측정한다. 프라다야마에서 호흡이 길어지기 때문에 이의 수행은 수명을 연장해 준다.
  • 프라나야마의 지속적 수행은 수행자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고 흡연, 음주, 성적 탐닉과 같은 세속적 쾌락에 대한 감각의 갈망을 상당히 감소시킬 것이다.
  • 프라나 야마를 행하는 동안 감각 기능은 내면으로 향하고 쿰바카 침묵의 순간에 수행자는 내부의 외침을 듣는다. '내면을 봐라! 모든 행복의 근원은 내면에 있어!' 이것은 또한 그로 하여금 요가의 다음 단계인 감각 기능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프락치와 하라 단계를 준비케 한다.
  • 프라다 야마를 수행하는 동안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시간의 경과는 신성한 단어나 명호를 속으로 반복 Japa 함으로 알 수 있다. 이런 신성한 단어나 명호의 반복은 요가 수행자의 마음이라는 뜰에 심어진 씨앗 BIA이다. 이 씨앗은 자라서 그를 요가의 여섯 번째 단계인 집중 그리고 디아나 dhyana에 적합하게 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마디 samadhi라고 하는 열매를 맺는데 그곳에서 완전한 의식과 최상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고, 요가 수행자는 우주의 창조자와 합일되고 그가 결코 표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숨길 수도 없는 환희심을 느낀다. 말은 경험을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고 마음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한다. 그것은 모든 이해를 뛰어넘은 평온, 그 평온의 느낌인 것이다.

 

발다스 BANDHAS, 나디스 NADIS 그리고 차크라스 CHAKRAS

  프라나야마의 항법을 따라 하기 위해서는 바 다스, 나이스와 차크라 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반다 Banda는 속박, 함께 모으는 것, 족쇄, 붙드는 것을 의미한다. 신체의 어떤 조직이나 부분이 수축하거나 조절되는 자세이다. 난데 NAD는 몸 안에 있는 에너지가 흐르는 관 모양의 통로이다. 차크라 C ha KRAS는 차륜 또는 원을 의미한다. 몸을 기계로 비유한다면 차크라는 기계 장치의 플라이휠(속도 조절 바퀴)이라 할 수 있다.
발전해서 목적지까지 송전하기 위해서는 변압기 도선, 퓨즈, 스위치, 절연선 등이 필요한데 이들이 없으면 발전된 전기는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프라나야마의 수행으로 프라다가 요가 수행자의 몸 안에 흐르도록 만들어질 때 에너지의 분산을 막고 다른 부분에 해를 미치지 않고 정확한 부분에 그것을 옮기기 위해 반 다들 band has를 써야 한다. 반대 행법이 없다면 프라다는 소실될 것이다.

  프라나야마에서 중요한 세 가지 반대 band has를 써야 한다. 반다 행법이 없다면 프라다는 소실될 것이다.
프라나야마에서 중요한 세 가지 반대 Band has는 1) 잘한다고 반대 Jalandhar Banda, 2) 우디 아나 반다 Uddiyana Banda, 3) 물라 반대 Ula Banda이다.

 

  요가 수행자가 완전히 체득해야 할 첫 번째가 잘난 다라 Jalandhar이다. 잘라 JAL은 거미, 거미집, 격자 또는 망사를 뜻한다. 잘난 다리에서 목과 목구멍은 수축하고 턱은 흉골 맨 위의 쇄골 사이에 있는 V자 모양의 가슴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사를 반가 아사 나와 그 사이클을 행할 때 체득되며 턱은 또한 흉골에 의해 눌린다. 잘한다고 반대는 심장, 경선(經腺), 뇌를 포함한 머리로 흐르는 혈액과 프라다를 조절한다. 만약, 자란다고 반대 없이 푸라나 야마를 행한다면 즉시 심장, 안구, 귓속에 압박이 느껴지고 머리는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잘한다고 반대는 프라나야마의 세 과정, 즉 들숨 puraka, 날숨 rechaka, 지식 kumbhaka에 필수적이다. 웃디 아나 Uddiyana는 위로 날더라는 뜻이다. 우디아나 반대의 과정은 횡격막을 흉부까지 들어 올리고 복부 기관을 척추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우디아나 반대를 하는 동안 큰 새로 표현되는 프라다는 척추(Meru-dada, spinal column) 안쪽에 있는 신경 에너지가 흐르는 주요 통로인 수수만 난데 susumna NAD를 통해 상승하게 된다. 우디아나 반대는 반대 중에서 최상의 것이며, 이것을 영적 스승이나 대가의 지도대로 지속해서 수행하는 사람은 다시 젊어진다고 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코끼리를 죽인 사자라고 불린다.

  이것은 단지 숨을 내쉰 뒤의 바야 쿰바카 bah ya kumbhaka 동안만 행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숨을 완전히 내쉬고 나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전에 행한다. 이것은 횡격막과 복부 조직을 단련시킨다. 횡격막을 들어 올림으로 생기는 공간은 심장 근육을 부드럽게 마사지하고 좋은 상태가 되게 한다. 우디아나 반대는 안타라 쿰바카 antara kumbhaka 동안, 즉 숨을 완전히 들이마시고 내쉬기 전의 멈추는 시간에 행해져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심장과 횡격막을 긴장시키게 되고 눈은 부을 것이다.
물라 Ula는 뿌리, 근원, 기원 또는 원인, 근본, 기조를 의미한다. 물라 반대 Ula Banda는 항문과 음낭 사이의 부분이다. 이 부분을 수축시킴으로 그 기운이 아래로 향하는 아팠나 비유(AANA Vayu, 하복부에 위치한 프라다)는 가슴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프라다 바 유 Prana Vayu와 합쳐지기 위해 위로 흐르게 된다.

 

 

  물라 반대는 우선 안타라 쿰바카(들이마신 뒤의 지식) 중에 행해져야 한다. 배꼽과 항문 사이의 하복부 부분은 척추 쪽으로 수축하고 횡격막 쪽으로 끌어올려진다. 우디아나 반대에서, 항문에서 흉골 부분의 횡격막까지의 전체가 척추 쪽으로 끌어당겨지고 올려지지만 반대에서는 항문과 배꼽 사이의 전체 하복부가 수축하여 척추 쪽으로 당겨지고 횡격막 쪽으로 올려진다.

'항문 조임근을 수축시키는 수행(Asvini Mudra)'은 물라 반대를 완전히 체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 스바 Sava는 말(馬)을 뜻한다. 이 무드라(Mudra, 봉함 자세)는 말이 방뇨하는 것을 연상시키기에 그렇게 불린다. 이것은 다양한 아사나 같은 사람들 특히 타다 아사나, 싫으사 아사나, 사를 반가 아사나, 우리 그가 다 누라 아사나, 우스터라 아사 나와 파스 치모 타나 아사나를 행하는 동안 체득돼야 한다. 이러한 반대 Banda의 수행으로 16개 아 다라 들 Adhara가 닫힌다고 한다. 드리(HDR 지탱한다)라는 어원에서 비롯된 아 다라 Adhara는 자주, 급소, 핵심 부분을 뜻한다. 16개의 필수 부분은 엄지손가락, 발목, 무릎, 넓적다리, 음경의 포피, 생식기관, 배꼽, 심장, 목, 인후, 입천장, 코, 미간, 이마와 머리 그리고 브라마란 드려(영혼이 몸을 떠날 때 빠져나온다는 정수리의 틈)이다.

  숙련된 영적 스승이나 교사의 개인적 지도 없이 혼자 우디아나 물라 반대를 배우려고 시도하는 데는 큰 위험이 따른다. 부적당한 우디아나 반대의 실행은 무의식적인 정액 배설과 정력의 손실을 가져오며, 물라 반대의 부정확한 수행은 생식능력을 떨어뜨려 수행자를 심각하게 약화할 것이다.
물라 반대의 정확한 수행조차 나름대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사정자제력(射精自制力)을 증가시켜 수행자로 하여금 그 힘을 남용하도록 부추긴다. 만약 그가 이런 유혹에 굴복한다면 그는 자기를 상실하고 만다. 그의 모든 잠자던 욕망이 일어나 잠자던 뱀을 지팡이로 때린 것처럼 치명적으로 된다.
이 세 가지 반대를 완전히 체득함으로써, 요가 수행자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한쪽 길은 세속적 쾌락 즉 향락 boga로 향하고, 다른 쪽은 요가 곧 지고의 정신 Supreme Soul과의 합일로 이끈다. 세속적 쾌락에의 유혹이 더 크다. 하지만 요가 수행자는 창조자에 대해 더 강렬한 열망을 갖는다. 감각 기능은 외부를 향해 열려 있어 필연적으로 그들은 욕망의 대상에 유혹되어 향락 boga의 길을 따른다. 만약 감각 기능의 방향이 변하여 내면으로 향한다면 그들은 요가의 길을 따르게 된다. 요가 수행자의 감각 기능은 모든 창조의 근원, 창조자를 만나기 위해 전환된다. 구도자가 3개의 반대를 완전히 체득했을 때가 영적 스승의 지도가 가장 절실한 때이다. 왜냐하면 영적 스승의 적절한 지도에 힘입어 그동안 배양된 정신적 역량이 보다 높고 고상한 탐구를 위해 승화되기 때문이다. 이때 수행자는 우리 그가 레우스(성욕을 승화시킨 사람) 곧 금욕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 그의 생식능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이때 그는 덕성과 영적인 힘을 갖게 된다. 그가 가진 힘은 태양처럼 외부로 빛날 것이다.
 
  물라 반대를 수행하는 동안 요가 수행자는 모든 창조의 진실한 근원, 곧 물아(Ula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목표는 마음 manas, 지성 buddhi와 자아 ahamkara를 포함한 총체적 마음 Chita의 완벽한 억제 혹은 조절이다.
인체는 그 자체가 바로 작은 우주이다. 화젯거리여 Hath라는 말은 각각 태양과 달을 뜻하는 음절 ha와 Th로 구성돼 있다. 태양과 달 에너지는 2개의 주요 나디(에너지 통로)인 핑 갈라 Pin gala와 이다 Ida를 통해 흐른다고 하는데 각각 오른쪽과 왼쪽 콧구멍에서 시작하여 척추의 아래로 이동한다. 핑 갈라는 태양을 나디이고 있다는 달을 나디이다. 수금이나 Susumna는 불의 나디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수금이나 난데 Susumna NAD는 신경 에너지 흐름의 주요 통로이며 메로 단다 Meru-dada 곧 척추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핑 갈라 Pin gala와 이다 Ida는 서로 교차하며 또 여러 장소에서 수금이나 Susumna와 교차한다. 이 교차점들을 차크라 Chakras 또는 신경중추라고 부르고 속도 조절 바퀴가 엔진을 조절하는 것처럼 인체 구조를 조절한다.

  주요 차크라 들은 Chakras 은 항문 위 골반 부분에 있는 물라 다라 차크라 Ula dhara Chakra (Ula =근원, 원인, 뿌리, Adhara =지주, 또는 생명의 부분), 생식기관 위에 있는 스바 디스 타나 차크라 Svadhisthana Chakra(SA= 생명력, 정신, adhisthana= 자리, 거처), 배꼽 부분에 있는 많이 푸라 하 차크라 Manipur ka Chakra(Manipur= 배꼽), 배꼽과 심장 사이의 마나스(manas= 마음)와 수리아(Surya= 태양) 차크라, 심장 부분에 있는 아 다하다 차크라 Anahata Chakra(anahata= 심장), 인두 부분의 비수다 차크라 Visuddha Chakra(visuddha= 순수한), 미간이 아니나 차크라 AJA Chakra(AJA= 명령), 천 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라 불리는 대뇌의 공간에 위치한 사하 그라 차크라 Sahasrara Chakra 그리고 이마 윗부분에 위치한 라라 타 차크라 Lala ta Chakra(Ialata= 이마)이다.
이러한 차크라 들은 호르몬과 다른 내분비물을 신체 조직에 제공하는 내분비샘에 해당한다. 물라 반대와 스바 디스 타나 차크라는 아마도 생식선에 해당한다. 이 두 차크라 사이에는 열정과 사랑의 신 카마 Kama의 이름을 딴 카마루파(Kamarupa, 생식기의 자리)가 있다. 위장, 비장, 간장, 췌장과 같은 복부 기관은 많이 푸라 하 차크라에 해당한다. 두 개의 콩팥은 마나스와 수리아 차크라를 상징한다. 아니하다 차크라는 심장과 그 주변의 주요 혈관이다. 비수다 차크라는 갑상샘, 부갑상샘, 흉선이다. 아니나, 사하 그라, 라라 타 차크라는 뇌와 뇌하수체와 송과선이다.

 

  프라나야마의 목적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신성한 우주의 힘, 쿤달리니 Kundalini를 일깨우는 것이다. 쿤달리니는 척추의 밑부분 물라 다라 차크라에 있는 최하부 신경중추에서 똬리를 틀고 잠자는 뱀으로 상징된다. 이 잠재 에너지는 일깨워져 척추를 타고 올라가서 차크라 들을 통과하여 사하구라( 속에 천 개의 잎을 가진 연꽃, 뇌 속의 신경 얼기)까지 올라가 거기에서 지고의 정신(Supreme Soul, 대우주의 기)과 결합해야 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우디아나 물라 반대의 수행으로 얻어지는 엄청난 생명력, 특히 성적 생명력을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쿤달리니를 일깨워 상승시킨다는 것은 성적 에너지의 승화를 표현하는 상징적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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